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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끄적끄적 2015. 1. 20. 11:51(하성준식) 치정, 그 후
한바탕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원인터네셔날 16층은 침묵에 휩싸였다.
정확히는 침묵이 아니라 각자의 메신저에 오늘의 사건을 옮겨 담느라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그 파도의 진원지인 준식은 양 손이 하얘지도록 꽉 쥔 채로 회의실에서 쓴 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가끔 부장이 버럭 화를 내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했다. 처신을 어떻게 하는 거야 성 대리!! 고함소리는 회의실 밖으로, 그리고 사내 메신저를 타고 이제는 사옥 전체로 돌고 돌고 돌고있었다.
"으이구 화상. 그렇게 얄밉도록 처세하고 다니더니 어째 이런 건 허술하게 걸리고 다녀요."
제 사수의 행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석율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혼자만 들릴 소리를 중얼거렸다. 하고 다니는 꼴이 한 마리 나비, 아니 나비는 너무 예쁘니까- 나방 처럼 팔랑팔랑 거리던 사수는 꽃놀음인줄 알고 뛰어들었다가 촛불도 아니고 장작불에 시꺼멓게 재가 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저래놓고 다시 회사를 다니면 진짜 내가 성준식 저 또라이 인정. 완전 철판왕인거 인정한다 정말.
그 때, 16층으로 누군가 허겁지겁 들어온다. 분명히 16층의 일이 온 회사에 다 퍼졌으니 모두들 궁금해 하고는 있지만, 사건이 망측스럽기 이를데 없는 뒤에서나 씹기 딱 좋은 소재라 아무도 차마 올라오지는 못했는데 누굴까. 그러나 석율이 파티션 위로 고개를 들지 않아도 워낙에 좋은 풍채는 잘만 보였다. 자원팀의 하성준 대리, 안영이의 사수다. 석율의 파디션 옆으로 다가온 하대리는 석율을 보며 슬쩍 회의실 쪽으로 고개짓을 한다. 아직 안에 있냐는 뜻이었다. 석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쯧, 작게 혀차는 소리를 하고는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다시 뒤돌아 나갔다.
헤에- 동기사랑이라 이건가. 이런 때에도 꽤나 끈끈하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모니터의 사내 메신저에는 두 명의 사람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김동식], [장백기] 읽지 않아 깜빡이는 메신저 창 중 하나를 켰다. [장백기: 강대리님 표정이 장난이 아닌데 16층 분위기 어떱니까, 한석율씨?] 읽지 않은 나머지 메시지 하나가, 보낸이가 빨리 읽고 답변을 달라는 듯 메시지의 갯수가 늘어나 숫자가 올라가고 계속 깜빡깜빡거렸다.
잠깐 사이에 세 명의 대리들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도 남을 것 같아 석율은 분위기에 맞지는 않지만 너털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직접 온 건 하대리님 밖에 없네. 제 동기한테 먼저 답하기 위해 움직이는 손가락에 의해 석율의 키보드도 다른 사람의 것처럼 타닥타닥 바쁘게 움직였다.
어휴 등신-, 천하의 병신같은 새끼. 그러게 아랫도리 간수 잘 하고 다니라니깐 유부녀가 뭐냐.
16층과 17층의 비상계단 사이층에 쭈그리고 앉아 성준은 비맞은 중마냥 욕을 중얼중얼 거렸다. 물론 준식에 대한 욕이었다. 잠깐 외근 다녀온 사이에 회사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섬유팀 성준식 대리가 유부녀랑 바람을 폈고, 그래서 그 남편되는 사람이 와서 16층을 뒤집어놓고 갔다는 소문은 이미 전 사옥에 여섯 바퀴는 돌고 난 후였다. 15층에서는 이미 친한 무리들끼리 여기저기서 모여 그 일을 간식삼아 열심히 씹어대느라 바빴다.
개새끼. 그러고 발정난 개처럼 달랑거리고 다니다 큰코 다친다고 내가 그렇게 몇번을 경고했건만. 팔랑거리고 돌아다닐 때 알아봤다. 성준은 담배가 말렸다. 지금이라도 흡연실로 가서 담배라도 한 대 폈으면 좋겠는데 이제 곧 성준식이 나올 때가 됐다. 그 성격에 쪽팔린건 못참으니 자리 지키는 건 못할거고 여기로 올거다. 지 수틀리는 일 있어서 찡찡거리면 여기서 성준을 만나는 것이 둘 사이의 암묵적 약속이었다. 우습네, 약속이라니. 여자라면, 아니 정확히는 비싼거 좋은거라면 사족을 못쓰고 여기저기 가볍게 구는 새끼 두고 뭔 싸구려 로멘스냐. 성준은 자조했다. 담배가 간절했다. 담배가 아니라 술이라도 진탕 마시고 싶었다.
끼익-
얼굴이 퉁퉁 부은 성준식이 들어왔다. 아마 화장실에서 얼굴이라도 씻고 온듯 물기가 어려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단추 몇개는 어디로 나가떨어졌는지 없고, 눈가와 뺨에는 알록달록한 멍이, 입가에는 피딱지가 총천연색이었다.
"병신 새끼 꼬라지 봐라. 이젠 좀 정신 차렸냐?"
"내 염장 뒤집으러 온거면 그냥 조용히 꺼지지? 충분히 좆같거든 지금?"
대뜸 욕부터 하는 성준에게 준식도 지지 않고 발끈한다. 저 성질머리는 암튼 지금 같은 때도 죽지를 않는다. 17층 쪽으로 오르는 계단에 걸터 앉아 있던 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내려와 여기저기 쓸리고 멍든 얼굴을 휘휘 살펴본다. 턱을 잡은 거친 손길에 어디가 터졌는지 준식이 아프다고! 또 빽빽 거린다.
"쯥- 닥치고 가만히 좀 있어봐. 너 여기 도망왔다고 온 회사에 소문낼래? 와 개새끼 그렇게 화려한거 좋아하더니 아주 얼굴이 알록달록 난리도 아니네. 이꼬라지를 하고도 잘도 아직 회사에 있다 너? 그래서 자리는 어떻게 하고 왔는데?"
"급한 일 없어 지금. 씨발 급한일 있어서 외근이라도 나가있었음 좋았을건데-"
뭘 잘했다고 떽떽거리던 준식이 고개를 푹 숙인다. 어찌저찌 자리를 두고 빠져 나오긴 했는데, 다시 돌아갈 자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휴 병신같은 새끼, 감당도 못할 짓을 저지르긴 왜 저질러.
"좀 봐봐, 너 의무실이라도가...ㄹ.."
"왜, 온 회사에 얼마나 쳐맞았는지 광고하게 사진이라도 찍어서 인트라넷에 올리라고 하지 그래?"
성질을 빽 내는데 덩달아 성질이 난다. 새끼야 니가 자초한 일을 왜 나한테 성질을....
버럭 화를 내려는데 푹 수그든 고개가 위 아래로 떨린다. 머리도, 작은 어깨도, 작은 등도.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라이 병신. 성준은 준식의 팔을 잡아 끌어 품에 안았다. 터진 상처가 쓸린듯 움찔한 성준의 눈에선 눈물이 본격적으로 그렁그렁 더 나와서 성준의 품을 적셨다. 맞을 데도 없으면서 맞고다닐 짓은 대체 왜 하는거냐 바보같은 성준식아.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며 하는 소리에 히끅 거리면서도 대답은 못한다. 창피한거다. 어떻게 안 창피할 수가 있겠어. 나만 아껴주는 이 새끼를 두고 좋은 시계에 좋은 옷 사준다는 소리에 팔랑거리며 여기저기 쏘다니다 이꼴 난건데. 준식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냥 손을 들어 성주의 셔츠만 꽉 쥐었다. 그래도 곧 죽어도 잘못했단 소리, 미안하단 소리는 못한다. 성준이 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를 이리 저리 정돈했다. 그 손길이 투박한 손에 어울리지 않게 퍽 다정했다.
"야 너, 성준식아"
"왜"
울음이 잦아들자 성준이 답지않게 가만가만 부른다. 준식도 답지 않게 얌전하게 대꾸한다.
"내가 내 카드고, 월급통장이고 다 니 준다그러면 너 그냥 나한테 올래?"
"뭐래 병신이"
"니 돈 좋아하잖아. 내가 너보다 인센티브도 적게 받고 그러긴 한데 나도 나름 괜찮게 벌지 않겠냐? 그거 다 너 주면 너 그냥 안 쏘다닐 수 있겠냐? 넌 돈이 좋고, 난 니가 좋으니까 괜찮지 않냐."
"...."
"진짜 이짓거리도 못해먹겠다. 너도 쪽팔리잖아. 쪽팔릴짓 하지 말고 나랑 연애든, 섹스든, 쇼핑이든 뭐든 둘이만 하자 그냥"
"..."
"..응?.."
"....싫어.."
품에서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웅얼웅얼 하는 주제에 잘도 거절하는 준식 때문에 허탈해진 성준은 준식의 양 어깨를 붙잡고 품에서 잠깐 떨어트려 얼굴으 본다.
"왜, 부족하냐"
"니를 어떻게 그런 취급하냐 병신아. 그여자들은 내 지갑이고, 너는 내 친군데."
할 말이 없다. 너는 내 친군데. 치사한 새끼 뭐라고 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네. 성준의 속이 속이 아니게 착찹했다. 얼마간 그러고 있다가 이번엔 준식이 어깨에 있는 성준의 손을 떼어낸다. 나 먼저 들어간다. 고마워 너 빌려줘서.
"야-"
"왜."
"너 사표 쓸거냐?"
"미쳤냐. 이직하더라도 소문 꺼지기 전까지 국으로 버티다가 이직해야지"
"암튼 미친새끼. 너 답다. 너 너네 과장님한테 잘해라. 아까 보니깐 니네팀만 조용하드만."
"알어 나두."
끼익- 다시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준식의 작은 몸이 쏙 사라진다. 눈으로 그 모양을 다 쫓던 성준은 문이 완전히 닫히자 마자 머리를 헝클어 트린다. 한숨이 크게 쉬어진다.
"차라리 지갑이라도 됐음 좋겠다. 좆같은 친구. 씨발"
담배가 다시 말렸다. 이젠 기다릴 이 없는 성준은 그대로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옥상에 가서 담배라도 한 대 피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면서 입에서는 욕지기가 뱉어졌다. 씨발놈. 그냥 좀 져주지. 친구? 씨발 언제부터 입맞추고 몸부대끼는 사이도 친구가 됐냐. 시발.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준식은 비상계단 바깥에서 문에 그냥 기대있다.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지만 성준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발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진다. 병신아 너를 어떻게 그렇게 취급해....
"내깟게 뭐라고 니 애인을 하냐."
+
준식은 요란한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 하루종일 예민했던 탓에 수면안대를 쓰고 별짓을 해도 잠이 안와 수면제까지 한 알 먹은 상태라 머리도, 눈꺼풀도 무거웠다. 끈질긴 초인종 소리는 끊길 줄을 몰랐다. 잠이 깰 정도면 얼마나 저걸 눌렀단 소릴까.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데 이제는 문까지 탕탕탕 쳐댄다. 아니, 치는게 아니라 걷어 차는 것 같다.
"성준시익... 준식아"
문을 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이 시간에 저렇게 쳐들어 와서 문을 두드릴 사람은 자기가 아는 이 중 오로지 성준 뿐이었다.
"미친놈아 지금 몇신줄 알고...읍.."
문을 열고 낮은 목소리로 왈칵 화를 내려는데 양 팔목이 잡혔다. 그대로 현관 안으로 성큼 들어와 들이대는 입에 치아끼리 부딛혀 이가 얼얼했다. 연고를 발라 겨우 피딱지가 진 입술이 다시 터진듯 쓰렸다. 그리고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신호가 되듯 들어와 다 터진 입안을 쓸어오는 거친 혀에 준식이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을 냈다. 그 소리에 입술을 떼고 자신을 바라보는 성준의 눈에 준식이 흠칫한다.
두 눈에 물기가... 아니 물기 어린 눈 속에는 형형한 불기가... 기겁한 준식이 얼른 팔목을 털어내고 몸을 빼려고 했지만 성준이 더 빨랐다. 양 손에 힘을 꽉 쥐니 팔목이 얼얼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멍을 달고 있는데 팔목에도 꼴사나운 멍이 추가될 것 같았다.
"야..야..! 이 미친놈아..!"
퍼뜩 겁이 난 준식이 눈을 질끈 감고 밀어내 보았지만 꼼짝달싹도 안한다. 타고난 체격도, 근력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은 해왔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술에 푹 절여진것 같은데 힘은 더 세진 것 같다. 아니, 나한테 제 힘을 다 쓴 적이 없으니 이게 원래 성준의 힘이려나. 아직 수면제의 기운이 가시지 않아 무거운 몸이 속절없이 뒤로 밀린다. 손목을 꽉 쥐고 다가오는 얼굴을 피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지만 돌아 오는건 피식 웃는 비웃음 뿐이다.
"턱주가리 붙잡혀서 할래 아님 그냥 할래? 난 강제로 입맞추고 그런 취미는 없거든?"
니가 하는건 지금 강제가 아니면 뭐 짝짝궁이 맞아서 하는거냐 이 싸이코패스 새끼야!! 버럭 화를 내려고 하다 아차, 말렸다 싶었지만 피할 새도 없이 입이 맞춰졌다. 두 입술이 퍼즐의 볼록한 부분과 오목한 부분처럼 꽉 맞아 맞물려왔다. 그리고는 뒤로 뒤로 뒤로... 어느새 침실로 왔는지도 모르게 뒤로 쓰러졌다.
"성준식. 성준식아- 준식아. 너랑 나랑 친구 아니야. 친구? 좆까지마. 너랑 내가 언제부터 친구였어. 이러는데도 너랑 내가 친구야? 새끼야 말해봐"
목덜미와 가슴팍을 물어뜯으며 오열하는 성준의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준식은 차마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몸부림치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얌전히 쏟아지는 거칠고 슬픈 성준의 몸짓을 받아들이며 준식은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하성준아- 내가 너무 많이 왔어. 내가 너무 닳아 빠진새끼라, 도저히 안 되겠어. 니가 정신 차리고 나 버리고 가면 진짜 죽을 것 같아서 도저히 못 하겠어.
전하지 못하는 변명이 입에서 맴돌았다. 변명은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저 신음 소리만 방안을 슬프게 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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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에 의한 치정 사건 그 후. 얘네는 서로 마음이 있어도 이렇게 몇번은 밀어내다가야 겨우 만날 거 같아. 일방적으로 성준식이 밀어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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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끄적끄적 2014. 12. 18. 13:52(석율백기) 물고기
어렸을 적 내 꿈은, 물고기가 되는 것이었다.
주말을 달구는 예능에 나오는 앙증맞은 여자 아이의 소망을 나도 꼭 그 아이의 나이일 때 즈음에 꿈꿨었다.
언젠가 부모님과 함께 보던 TV에 나오는, 사위에는 수평선만이 존재하는 파랗다 못해 검은 빛이 도는 어느 바다에서, 나는 거칠것이 없이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었다.
물고기
(석율백기)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움찔하며 잠에서 깼다. 또 그 꿈이다. 파란 바다를 물고기가 되어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 쾌속정과 같이 빠르게 수면 아래를 미끌어져 움직인 나는 태평양 어느 한가운데의 다랑어였을까. 한석율과 밤을 보낸 첫 날부터 나는 그와 하는 날 항상 이 꿈을 꾸곤 했다.
"으응... 깼어? 몇시야?"
뒤척임에 잠에서 살짝 깼는지 그가 내가 기대고 있던 팔을 좀더 조여 어깨를 감싼다. 몸을 반 바퀴 돌려 끌어안아 맨 등을 쓰다듬는 손이 따듯하다.
"아직 밤중이에요. 좀 더 자둬."
"왜 자꾸 밤 중에 깰까... 아직 애기라 그런가?"
더 자두란 말에도 이미 잠에서 조금 깨어났는지 말을 더 건다. 능글맞게 물어오는 속에 묻어나는 걱정에 그냥 불면증기가 조금 있다고 둘러댔다. 항상 같은 꿈을 꿔서 깬다고 하면 걱정할게 뻔했다.
"따듯한 물 조금 마시고 자면 괜찮아. 석율씨도 얼른 자요. 내일 출근해야되잖아."
팔을 풀고 품에서 벗어나자 고개를 끄덕이며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는다. 잠들면서도 장난스럽게 얼른 물만 마시고 와서 일로 안기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잠자리를 갖는 날이면 항상 품에 안고 잠에 든다. 다정한 사람임과 동시에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다. 그게 좋아서 계속 만나고 있다. 전기주전자에 올린 물을 미지근하게 만들어 마신 후, 나는 다시 그의 품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팔을 껴안자 풀어내 팔베개를 해주고 남은 팔로 허리를 끌어 안는다. 나를 빈틈없이 감싸주는 이 안온함이 좋다. 그렇기에 자꾸만 잠을 방해하는 꿈조차 그의 품에서는 달콤한 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
"물고기?"
내린 커피를 내밀며 되묻는 목소리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고개를 작게 두어번 끄덕여주곤 커피를 호록- 마셨다. 딱 알맞은 맞과 온도다. 같은 기계가 내리는 커피이지만 그가 만드는 커피는 유독 더 맛있다.
"정확히는 물고기- 인것 '같아요'. 나는 내 모습을 못보고, 그냥 바닷 속을 빠르게 헤엄친다는 느낌이 드니깐."
"근데 왜 물고기야? 고래나 뭐 그런 것도 있잖아. 거북이도? 그러고 보니 거북이 잘 어울리네. 내 거북이 우리 장백기"
"헤엄치는게 이렇게 그랬거든요. 고래나 거북이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제가 왜 거북입니까. 저 안 느립니다."
손으로 물고기가 움직이는 모양을 표현하는데 덥썩 잡는다. 뒤에 이어지는 질문과 항변은 무시한채 잡은 손을 꾹꾹 눌러주고 빙글 웃는다.
"왜 안느려. 장백기씨 진짜진짜 느린데. 내가 몇달을 관심있다, 좋아한다 그렇~게 티를 내고 신호를 보내도 모르고, 뽀뽀를 해도 모르고, 술김이란 핑계로 키스 해도 모르고, 나랑 자고 나서도 몰랐잖아. 세상에 그렇게 공들이고 예뻐해줘가며 섹스해줬더니 기껏 하는 소리가 '한석율씨 애인이랑 할 때는 꼭 크림이든 윤활제든 사놓고 하세요. 아픕니다.'라니. 나는 첫뽀뽀 때부터 날짜를 세고 있었는데 말이야. 뽀뽀가 우스워? 발랑 까져서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과장된 한숨을 푹푹 쉬는 모양이 능글맞다. 그건 느린게 아니라 둔해서 그래요! 항변하자 너 니가 둔한 건 아는구나! 하고 밝게 대꾸해준다. 말싸움으로는 한석율을 이겨낼 재간이 애초에 없을 것이다. 금방 체념하고 그래요 그래요, 나 둔합니다. 한다.
"장백기, 나는 여우같은 마누라보다 곰같은 마누라가 더 좋아. 그리고 나 니모도 좋아해."
휴게실을 나서서 나는 내 자리로, 한석율은 16층으로 돌아가는 중 빙글 돌아서는, 갑자기 저 말만 툭 해주고는 과장되게 손을 흔들면서 그럼 퇴근시간 맞으면 만납시다 백기씨! 하고는 살랑살랑 돌아간다. 말을 되새기고는 금방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마음 속은 포슬포슬 따듯한 기운이 퍼지는거 같아서 남은 오후 시간 내내 즐거운 마음이 남았다.
*
"흐응- 아-"
"여기 엄청 예민해. 왜이렇게 가슴으로 느껴? 우리 백기씨 알고 보면 마음만 소녀같은게 아니라 진짜 소녀인가?"
"흐응- 장난하지 말고. 하 거기..거기요..."
그와의 잠자리는 보통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가끔 나는 모를 이유로 수틀리면 짖궂은 정도가 심해지고 끈질기게 괴롭히지만, 보통은 한 두번의 사정과 간단한 샤워로 마무리 하고는 한다.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닌 것 같다. 벌써 세 번째인데, 그는 이번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진짜 소녀인가 한 번 보자-' 하고 다리를 벌려 고개를 내밀길래 기겁을 하며 다리를 오무려 보지만 어림없다는 듯 잡은 팔에 힘을 준다. 방금전까지 자신의 것이 왔다갔다 한 곳을 살펴보는 그의 눈에서 즐거움이 보여 부끄러움에 몸둘바를 모르겠다. 이내 다시 손가락으로 주변을 둥글게 만져서 애를 태우고는 콘돔을 뜯고 그것을 씌운 자신의 것을 맞춰 넣는 석율의 행동에 머릿 속이 새하얘진다. 유성우처럼 쏟아져내리는 감각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물고기같네."
욕조 모서리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는 와중에 뜬금없이 중얼거린다. 안경이 없어 시야가 부옇다. 짐작으로 웃고있는 것을 알았지만 목소리는 새삼 진지했다.
"뭐가요."
되묻는 목소리는 쉬어있다. 그러고도 두 번을 더 했고, 욕실에서 또 했다. 신음을 죽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잠자리 스타일에 더불어, 종내에는 울음까지 터졌으니 당연했다. 뒷처리까지 마친 후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 같이 몸을 담구고 퍼져있는 중이다. 얽혀있는 다리가 자연스럽다. 등을 매끈하게 쓸어주던 손으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준다. 머리 내린 얼굴을 좋아한다. 그는 나의, 나는 그의. 나도 그의 머리를 쓱쓱 쓸어내리며 다시 '왜 닮았다는 겁니까' 물어보니까 코를 살짝 쥐고는 '또 딱딱하게 말한다.' 핀잔을 준다. 교제를 시작하고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까지 깍듯하게 말하는 내 말버릇을 완전히는 못 고쳤는데 그는 그런 것을 서운해 했다.
"뭔데요, 뭔데"
"어, 방금 진짜 귀여웠어. 조르는 거 같아서. 또해봐. 응?"
"말 돌리지 말고요-"
셀쭉하니 말하자 토라져 보였던 걸까, 양 손으로 뺨을 꾹 쥐고는 '으이구 우리 백기 삐져써여?'한다. 장난치지 말라고 손을 쳐낼랬는데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고 단단히 잡고는 호히려 꾹 누른다. 못난이 얼굴을 만들어 놓고는 뭐가 좋은지 깔깔 웃고는 삐쭉하니 튀어나왔을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입맞춰 준다. '왜냐하면 우리 백기는-'
"금붕어처럼 귀엽고"
쪽
"고래처럼 근사하고"
다시 쪽
"은어처럼 예쁘고"
다시 쪽쪽
"열대어처럼 예민하고"
쪽
"참치처럼 섹시하면서 맛있지."
이번엔 뺨에 힘을 풀고 쪽쪽 위아래 입술을 빨듯 물었다 떼고 그대로 깊게 입맞춘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 안으니 응답하듯 고개를 꺾어 다른 각도로 더욱 깊게 들어온다. 찰박 찰박 욕조의 물이 튄다. 꼭 바닷물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따뜻하고, 안온한 어머니의 뱃속 같을 바다...
아니, 정말로 나의 바다는-
나를 힘껏 생기있게 만들어 주는 만드는 너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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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쨌든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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